경건한 기독교 가정

경건한 기독교 가정
가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남자와 여자 즉 아담과 하와의 “일부 일처”를 창조하심으로서 시작된 것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축복 중에 축복인 것이다. (사도행전 10 : 1-8)

존 헬리어란 학자는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기를 국가의 복지는 행복한 가정으로부터 성립된다고 말했다. 또 웹이란 학자는 가정이란 무엇인가란 말에서 가정은 건물이 크고 작은 것이나,가구가 많고 적은 것이나,사용하는 생활비의 액수가 많고 적은 것이나, 자동차와 사환들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가정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가정인데 가정을 행복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외적 물량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고 정신에 있다.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자가 적어지고 작은 자가 커지는 곳이다. 가정은 서로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곳이 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을 받는 곳이다 라고 말했다.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의 글 속에 행복스런 자기 가정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면, “우리 가정은 사랑과 애정과 위안과 모든 행복의 보금자리이다. 우리 가정은 사나운 파도 이는 바다의 아늑한 포구요,소란하고 분주한 길에서 떨어지고 조용한 깨끗한 길이며 캄캄한 밤하늘에 깜박이는 별이다.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넉넉하지 못하다. 수도는 고장이 나고 지붕은 상해서 비가 새며 페인트는 다 벗겨지고 뜰안 길은 우들두들 하고 부엌은 연기가 난다. 분명히 우리 집은 미국에 사는 누구의 집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곳이야말로 내 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왜? 그 안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있으니까. 집은 풀과 나무와 벽돌과 회로 지은 것이나 가정은 인정과 눈물과 웃음과 서로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가정은 이 모든 요소를 구비한 가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글을 썼다. 이와 같이 가정은 “사회적으로 볼 때” 국가와 세계를 구 성하고 좌우하는 기본적 단위가 되는 것이다.

또한 가정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인간이 출생하고 그리고 성장하고 생활하다가 최후를 마치는 없지 못할 유일한 생활의 근거지가 가정이다. 만일 사람에게 가정이 없었더라연 인간 도 다른 동물과 같이 윤리와 도덕이 없을뿐만 아니라 참 가정의 행복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귀한 축복으로 주신 이 가정을 어떻게 운영하여 유지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가정을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리고 보다 더 행복된 가정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건한 기독교 가정으로서만 가능할 수있다. 그러면 경건한 기독교 가정은 어떠한 가정인가 ? 그 비결이 무엇인가 몇가지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1 . 가족과의 관계이다.

 

한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으로 결속하는 관계를 말한다. 사도행전 10 : 2에 보면 고넬료는 “경건한 가장”으로 온 집안 식구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인도하였다. 본문에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는 말씀이 있다.온 집이란 말은 그 집의 외모, 멋진 건물,가구를 말함이 아닌 줄로 안다.

“온 집안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란 온 집안 식구 즉 그의 아내,그의 자녀 및 그 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로서, 훌륭한 남편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는 훌륭한 현모양처로서,자녀는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효도하는 좋은 자녀로서,모든 식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기독교 윤리대로 온 집이 같이 믿고 화목하는 신앙가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이 한마디 말씀에 그 가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읍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다만 자식을 낳아서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세상 지식을 교육시키는 것으로서 다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란 우리 사람들의 마음대로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있는 쌀 한 톨 만들지 못하는 인간이 사람을 마음대로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함은 큰 잘못이다.

종교개 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만일 사람이 생명있는 단 한 송이 장미꽃을 만들 수있다면 온 제국이 저희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크게 두 가지 성품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공의요, 다른 하나는 사랑일 것 입니다. 이 두 가지 속성 즉 공의와 사랑이 자녀들의 인격 성장에 중요한 두가지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의 인격적 가정교육을 위하여 공의의 대표자인 아버지가 있고 사랑에 대표자인 어머니가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를 양육하게 하셨읍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자녀들의 순수한 사랑이 엉킨 것이 가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페스타롯치가 말한대로 부모님의 사랑은 봄 저녁에 내리는 이슬과 같고,자녀의 사랑은 아름답게 피어 오르는 꽃송이 같다고 말하였읍니다. 가정에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피니 (1881 ~ 1959)가 쓴 그리스도전이란 유명한 책이 있다. 파피니는 본래 무신론자요, 유물론자요, 반기독자였다. 어머니는 돈독한 신앙가였다. 파피니가 중병에 걸리었다. 그는 소생할 희망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병을 고치는데는 산 사람의 살점이 특효약이란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살을 베어 아들의 병을 고칠려고 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살점을 보고 이것이 웬 일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이것을 보고 놀라느냐? 하나님은 외아들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서 보내 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너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살을 찢으시고 그의 피 전체를 빼어 낸 것을 모르느냐? 그때 그 아들은 어머니, 이제는 알았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알았읍니다. 그는 회개하고 새사람 되어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전을 썼읍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이 넘치고 또한 그 자녀는 부모님의 교훈을 잘 받아 순종하여 믿음으로 결속된 가족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입니 다.

 

2 . 이웃과의 관계이다.

 

본문 행 10 : 2에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는 말씀이 있읍니다. 이것은 고넬료 가정은 남을 돕는 가정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은 동물과 달라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산다는 것은 이웃과 서로 상부상조함으로서 즉 서로 돕고 협력함으로서 즐겁고 의의있는 생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성도간에는 물론 나아가서 이웃과 협력하고 남을 돕는 것으로서 이웃에 빛이 되어야 하고 자신에 기쁨이 되어야 하겠읍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일하신다라고 하였읍니다. 믿음의 가정은 교회의 연속이요 전도하는 기관이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가정은 내 가족만을 위해 있는 것 이 아니라 이웃에 대하여도 의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겠읍니다.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돕는 일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일이요 반드시 있어야만 할 소금의 역활을 하는 참된 기독교 가정의 모습이라고 하겠읍니다. 그러나 우리 의 경제력이 부족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만도 너무나 부족한데 어떻게 남까지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이웃에 대하여는 눈을 감는 경우가 많읍니다. 실로 내 살림이 풍부한 다음에야 남을 돕겠다고 생각하면 이는 마치 세상 일을 끝낸 다음에 한가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과 같아서 결국 일평생 한 사람도 돕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요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읍니다. 내가 도와 줄 자도 얼마든지 있읍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처지에 따라서 알맞는 봉사를 발견하여 이웃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 아이 호아주에 나이 많은 노파 한 교우가 더구나 다리가 없는 불구자인 할머니가 바퀴에 앉아서 헌옷을 뜯어서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것을 만들어 무엇을 할려고 합니까 하니 그 할머니 대답이 이번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외로운 아이,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고 하였읍니다. 불구된 몸이라도 이웃을 도우려고만 한다면 그 돕는 방법이 없지 않음을 배울 수 있읍니다. 결국 문제는 물질이나 방법이 없음이 아니라 도우려는 마음, 도우려는 성의, 도우려는 관심이 없는 탓이라고 하겠읍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잠언에는 남을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 된다고 했읍니다. 하나님께 꾸어 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넘치도록 갚아 주신다고 하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하나님께 갚음을 받기 위함이기 보다는 그렇 게 살 때에 이 땅은 밝고 명랑하고 즐거운 사회.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되고 교회가 되고 살기 좋은 나라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읍니다. 신학교 졸업 반에 있을 때 (1964년도) 주일날 신현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남부교회에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었읍니다. 저는 예배당 중간에 초라한 신학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맨 앞줄에 머리가 더부룩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분이 조용히 앉아 예배 드리고 있었읍니다. 그 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교회로서 약300여 명의 신도가 모두 훌륭한 신사,숙녀의 차림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읍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나는 그 남루하게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을 따라 나갔읍나다. 그 사람은 교우들에게 인사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나갔읍니다.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에서 그 사람을 한참 따라 갔읍니다. 어느 셋 골목길을 들어 갔읍니다. 아이들이 길에서 놀다가 거지 온다 하면서 돌질을 하였읍니다. 그 사람은 아랑곳 없이 돌팔매를 맞으면서 지나갔읍니다. 저도 얼른 따라갔읍니다. 그리고 아저씨를 불렀읍니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저에게는 이 돈 100원밖에 없읍니다. 그 당시에는 100원짜리 시퍼런 지폐가 제일 큰 돈이었읍니다. 저의 가난한 신학생으로서는 전재산이었읍니다. 저의 호주머니에는 버스비 40전 정도가 남았읍니다. 이 100원을 주었더니 그분이 눈이 커지면서 받더니 저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돈을 두 손으로 높이 쳐들더니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기를 “오 하나님이여, 이 사람에게 대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자기 길로 갔읍니다. 나는 부끄러워 얼른 되돌아 왔읍니다. 돌질을 하던 아이들이 저를 보고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보다.거지에게 돈을 준데이.” 하는 것이었읍니 다. 저는 그 때에 돈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쩐지 기분이 좋았읍니다. 남을 도와 주고 산다는 것이 참 좋은 일인 것을 알았읍니다. 비단 우리가 남에게 물질만을 도와준다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칭찬하고 친절과 사랑을 아낌없이 줄 때 그리고 적은 인정을 서로가 나누어 줄 때 거기에 평화와 기쁨이 있지 않겠읍니까? 갈릴리 바다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요단강으로 내 보낼 때 그 바다는 살아있는 바다로서 싱싱한 고기가 살아 움직이지만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하는 염해는 죽은 바다로서 한마리의 고기도 살 수가 없는것이 아니겠읍니까?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압니다. 우리는 고넬료와 같이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성도의 가정이 참 경건한 기독교 가정인줄 압니다.

 

3 . 하나님과의 관계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

본문 10 : 2절 하반절에 보면 고넬료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하는 말씀이 있읍니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고넬료는 개인적으로 늘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의 제단을 쌓았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는 가운데 발견하고 또한 자녀와 이웃을 위하여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이었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산다고 하면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가정에 내 마음속에 모시고 산다면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기관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참 기독교 가정은 인간만이 합숙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늘 함께 교통하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늘 교통 함으로서 즉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함으로서 마귀에게 틈 탈 기회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과의 평화로서 채워지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이 하나님 앞에 경건히 기도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자녀들이 보고 듣고 해서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게 되고 부모를 닮아 훌륭한 신앙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앙의 가정은 기독교 교육의 온상이라고도 하는 말이 있고,또 부모에 대한 신뢰감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심으로 승화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원만한 가정에서 받은 뿌리 깊은 종교심과 사랑의 힘에 의하여 자라났고 불량하고 불행 한 사람들의 배경을 보면 대부분이 불행한 가정 불건전한 가정에서 자라난 것을 알 수 있읍니다. 미국 하바드 대학 청소년 범죄자 통계를 조사한 결과를 책에서 읽어 보았읍니다. 청소년 범죄자 수천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가 대부분 아버지의 과음,부모 사이의 불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어머니의 냉담으로 인해서 범죄한 청소년이 80%의 절대적 다수를 점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청소년 범죄자들의 거의 다수가 파괴된 가정 배경이었으며, 종교적 신앙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있다고 해도 극소수인 2%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종교적 훈련이 있는 가정. 원만한 가정에서는 불량한 자녀가 거의 없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상 경건한 기독교 가정을 생각하면서 고넬료의 가정같이

  1. 신앙으로 가족들이 단결하여 기독교 가정 윤리를 지키고
  2.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며
  3.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날마다 기도하며 감사하여 경건한 기독교 가정으로서 우리 자신들이 행복된 가정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이 전통을 자손 만대에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덕원 목사 (교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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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9??년 ?월에 발간된 한마음 제 17호 4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재개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