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국

나의 조국

달나라에 첫 발걸음을 내딛듯 두렵지만 호기심과 꿈이 가득찬 마음으로 엄마, 아빠를 따라 두 남동생들과 함께 L.A.공항에 도착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쩌 6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나갔다.

1979년 4월 15일, 부활절에 미국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키가 커다란 가로등으로부터 불빛들이 L.A. 거리를 환하게 비쳐 주고 있었다. 가로등 불이 모자라서 컴컴한 한국 거리에 비하면 미국의 거리들은 밤과 낮의 차이였다.

마중 나오신 아빠 친구가 운전하시는 자동차를 타고 나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주님, 미국에서의 나의 삶이 이 미국 도시 L.A.처럼 항상 밝게 빛날 수 있게 도와 주소서」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현실은 인정사정 없이 몰려와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실망과 아픔도 겪 어야만 했었다. 미국에 도착한지 삼일째 되는 날 동네에 있는 중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한 달쯤 다니다가 이 곳에 왔으나 한 학기가 빠른대로 7 학년생으로 입학했다. 낯선 외국인 학생들과 지낸 방학 전 두 달 동안이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긴 고통과 치욕의 시간이었다.

학교에 들어가서 국민학교 3, 4학년 짜리한테 애기들이 읽는 그림책을 가지고 글 읽는 법을 배우던 부끄러움, 말도 못하는 바보 동양인이라고 손가락질과 놀림을 당할 때에 받은 창피와 억울함은 직접 당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 당시에 내가 학교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두려워 했는지는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모르실 것이다. 부모님께 걱정끼치는 것이 싫었고 또 내가 받는 수치를 다시 반복하며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다면 동생들처럼 귀찮게 구는 아이들과 싸우기라도 하겠는데, 그러지도 못 하겠고, 내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열두살의 어 린이의 생각으로 나중에 나를 못살게 굴던 이 미국 아이들을 이겨서 보복을 하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언어 불편을 불구하고 학교 성적이 우수해졌고 영어도 웬만한 미국 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아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학교 과목에서마다 우등생 상장을 탔으며 영어에서도 노력상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Honor Class 를 택하면서도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을 수 있었다. 약속대로 내 마음에 상처를 주던 애들을 이긴 것이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훌륭해지면 없어질 줄로만 알았던 내 마음의 상처는 없어지기는 커녕 또 다른 아픔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던 수치는 어느새 외로움으로 변하였다.

미국 사람들을 이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으나, 미국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Outsider, 외국인으로 따돌림 받는 것이 싫었고 그들과 똑 같아지기를 원했다.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내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고 전혀 필요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84년 7월에 있었던. L.A.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영락교회를 다니는 나는 한복을 입고 소수민족 축제 (Parade)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나라 사람들이 모인 그 곳에서 자기 나라 말로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 미국에서 태어나 자기 나라 언어는 커녕 자기들의 역사
도 전혀 모르지만 올림픽에 나가는 재미로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옷을 걸치고 나온 사람들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 특별히 나타나는 그룹은 역시 우리나라 고유 의상을 입은 우리 한국인들이었다. 미국에 온 시간들이 모두 다르고 미국에서의 생활도 각각 틀린 우리 한국 소녀들이었지만, 눈부시게 화려한 한복을 입고 하나가 되어 한국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복에 반해서 그 고상한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마다 으쓱해지는 마음이란…

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하고 몸에 꽉끼는 옷을 입고 총총 걸음으로 다니는 일본 대표들, 고유의 옷이 없기에 겨우 자기네 옷도 아닌 인디언 옷을 입고 얼쩡거리는 미국인들, 그들에 비해 우리 한복은 얼마나 전통있고 품위 있는지 마음으로부터 솟아 오르는 긍지와 자랑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두들 꼬리를 핀 공작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연습에 참여했다. 연습 시간은 길었고 한 여름이었기에 더위와 피로로 모두 지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었기 때문에 불평없이 모두 열심을 다했다.

올림픽 개회식을 시작하기 전 밖에 줄을 서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리 순서틀 기다리고 있었다. 축포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수 많은 풍선들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마치 온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소망을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우리 행진은 맨 마지막 순서로 온 세계 선수들이 입장한 다음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기 나라 국기들을 앞세우고 자신만만하게 입장하는 선수들을 지켜보며 우리 한국 소녀들은 열심히 태극기만을 찾았다. 저 멀리서 태극 부채를 높이 들고 행진해 오는 한국 선수들을 발견한 우리들은 작은 태극기와 태극 부채를 흔들며 『대한만국 만세 / 한국 / 한국 ., Korea/ Korea! 』하며 목이 터져라 정신없이 외쳤다.

나도 질세라 고함을 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안 당하기 싫어 얼른 옆을 둘러 보니 나 혼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많은 나의 친구들의 얼굴에도 감격의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분명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역시 한국인이구나 ., 』 미국에 와서 바쁜 생활 속에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의 조국, 수치 속에서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한국 땅,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고향을 못 견디게 그리워 한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나 혼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났던 많은 나의 친구들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그럴까? 이 질문에 대한 내답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반만년의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우리 조상들의 희생과 봉사,지금은 허무한 세월 속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은 우리 조국 땅에 스며졌고 또 나의 핏줄 속에 흐르며 우리 민족의 얼은 우리들의 영혼 속에 깊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개회식이 끝난 후 선수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유명한 미국 선수들의 싸인을 받기에 앞서, 이름도 알아주지 않을 우리나라 한국 선수들을 찾아 해매었으며, 또 운동 경기 때마다 목이 터져라고 응원하여 한국 선수들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또 그들의 우승이 타국 섕활을 하는 우리 모두의 한 개인 개인의 빛나는 승리요,넘치는 자랑이 되었던 것이다.

지난 84년에 있었던 올림픽은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나라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를 알았다.

TV 앞에 앉아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도 열심히 소리지르며 응원해 줄 나라가 없는 베트남 사람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나라가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타국 섕활이 마치 감옥과 같이 느껴지리라.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받는 멸시와 천대를 피할 길이 없다. 그들에 비하변 우리 한국인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 마음에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는 대 한민국을 어떻게 미국에 사는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항상 우리보다 강하고 욕심이 많은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손해만 보던 불쌍한 우리 조국이 이제는 세계의 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다음번에 있을 88년도 올림픽을 주최하는 나라로서, 한국은 전에 없었던 많은 관심을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받고 있다. 나는 한국이 많은 금메달을 따내기에 앞서 한국을 방문할 많은 외국인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되기를 진정 원한다. 대한민국이 남에게서 도움만 받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도움을 괼요로 하는 나라에게는 언제나 도와줄 수 있는 정정당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기를 바란 다. 미국에 사는 우리 한국 청소년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Korean-American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인이기에 앞서 먼저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던 것 을 진심으로 감사한다.

미국의 유명한 Kennedy대통령의 말이 기억난다.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우리는 조국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바라기에 앞서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위해 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겠다. 나는 조국을 돕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실력을 쌓을 것이며 비록 미국 땅에 살더라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항상 기도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이연경 (Occidental College 2년)
대학부 문예 – 한국일보 주최 재미 교포 청소년 문예 콩쿨 우수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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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9??년 ?월에 발간된 한마음 제 16호 16페이지에 실렸던 대학부 문예글을 다시 재개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