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초대 받은 회갑연

사진: 한국 부흥회를 인도하는 밥 피어스 목사와 통역을 하는 한경직 목사님.
1950년대를 나는 충남 대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모대학 전임강사로 교직생활을 하게되어 결국 남편 직장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러던중 1959년 9 월 남편이 오랜 수속끝에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고생문은 활짝 열리기 시작한 셈이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려움이 많아 좌절하고 낙심하고 남편을 원망하며 엎치락 뒤치락 한심스러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1961년 가을이라고 기억하는데 전국 교역자 특별 수련회가 대전에서 개최되는데 강사는 한경직 목사님과 밥 피얼스 목사님이 오신다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고생하고 있던 나에게 한목사님이 오신다니 우선 기쁘고 반갑기만 했다.
교역자만 모이는 집회이지만 나는 개회 예배에 참석하여 피얼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멧세지 내용을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있는데 중국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모택동이라는 무기가 필요하며 언어를 통일하고 길을 닦아 놓 은 후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작업을 해야 하며 30년후이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하셨다. 피얼스 목사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의 예언은 30년이 지난 오늘날 이루 어지고 있지 않은가?
당시의 집회는 전국에서 천오백명의 교역자들이 모이는 대집회였었다. 예배가 끝난후 목사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마치 만리타국에서 친정아버지를 만난 심정이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목사님께서는 울고 있던 내가 무척 가엽게 생각이 드셨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어린 시절 목사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집회를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시면서 목사님께서는 대전역에서 당시 대전 제일교회 당회장이신 김만제 목사님에게 나를 잘 보살펴주도록 부탁하시면서 봉투를 맡겨 놓고 가셨단다. 김목사님은 우리 집을 찾느라고 몇일동안 고생을 하셨다면서 나를 찾아 오셔서 봉투를 전해주셨다. 그후부터 나는 제일교회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후 대전에서 뜻밖에도 강학주 장로님올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중부라사」라는 복지 도매상 책임자로 오신 것이라 한다. 객지에서 장로님을 만나니 친정오빠를 만난 듯 기쁘고 반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로님의 막내 여동생과 나는 한반에서 공부하던 소꼽 친구였다. 장로님에게는 아주 훌륭하신 믿음의 할머니가 계셨다. 최반석 권사님인데 한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지금도 가끔 최권사님 말씀올 하시곤 하신다. 목사님이 처음 신의주에 오셔서 목회를 시작하실 때 심방을 따라다니시면서 집을 가르쳐 주시고 누구 집에는 숫가락이 몇개며 아이들의 이름은 누구 누구라고 일러주시곤 하셨단다. 또 아버님되시는 강득록 장로님은 정의감이 강하시고 강직하신 분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강장로님과 신의주에서는 한번도 말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때 그분은 청년기에 접어든 멋쟁이 신사였고 나는 코 흘리던 주일학교 어린이였으니까… 그런데 몇십년이 지나 대 전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가까운 아저씨를 만난 심정이었다. 가끔 상점 앞을 지날 때면 들려서 옛날 이야기에 꽃피우기도 하고 서울 소식도 전해들으며 나는 어려운 객지 생활에 익숙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목사님이 오시니 어느 장소로 오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저녁 그 자리에는 한목사님과 사모님과 장로님, 작고하신 김원주 권사님 그리고 나,다섯사람이 ‘회전’이라는 대전에서는 잘 알려진 불고기 전문 식당의 작은 방에서 모였는데 이 모임이 바로 한목사님의 희갑연이라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회갑 잔치는 너무 초라하고 빈약했다. 목사님은 교회가 회갑연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피해서 오신 것이라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자랐기에 목사님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있는데 그분은 두벌 옷도 별로 안가지신 분이셨다. 새옷이 생기면 사모님 모르게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버리시고 한평생 집을 가져본 일은 더더욱 없고 헌금도 생기면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 버리시는데 내가 받은 그 봉투도 아마 목사님이 받으신 사례비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5.16후이고 화폐개혁 직후라 만져보기조차 어렵고 귀한 지폐였으니까 나는 그때 일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성갑 권사
이글은 19??년 ?월에 발간된 한마음 제 32호 21페이지에 실렸던 평신도 문예글을 다시 재개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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