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용목사님, 우리목사님

김계용목사님, 우리목사님

어느 교인이 자기교회 목사님을 남의 목사님으로 생각하리오만, 고 김계용 목사님 만큼 성도들의 애틋한 사랑을 받 은 분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김목사님은 일생 4 교회를 담임하여 섬기셨는데 그 교회들은 모두 크게 부흥하였다. 특히 이민교회인 브라질 연합교회와 나성영락교회에서 놀랄만한 교회성장을 이루시었다. 필자는 김목사님의 목회사역을 가까이서 도와 드렸던 목회자 중 한사람으로서 이상적인 이민목회자로서의 김목사님을 남겨 보고 싶어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중, 본지의 부탁을 받게 되었다. 좁은 지면에 아직 미흡한 내용을 정리할 자 신이 없어 사양하였으나 기자의 간청에 힘입어 김목사님의 이민목회자상을 간 략히 정리해 본다.

1. 왜 우리 목사님 이었는가?

각 교회는 그 교회에 맞는 목회자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그 교회에 맞는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는 자기에게 맞 는 교회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다. 이민 교회에도 이민목회에 맞는 목회자가 있 다. 필자의 견해로는 김계용목사님은 너무나 이상적인 이민목회자이셨다. 왜 냐하면 그분 자신이 이민자이었고, 생 의 순례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는 섬기는 목회 (Serving Ministry)이었다. 그는 늙은이에게나 젊은이에게 언제나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보여 주었으며, 남을 대접하기 를 좋아하신 분이었다. 그는 회의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남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는 소신이 강한 지도자였으나, 양보와 겸손과 인내로서 목적한 바 를 매우 부드럽게 관철해 내는 지도자였다.

1.1 그분은 우리중의 하나이셨기에.

크리스챤 리더쉽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 데 거하신 분이시다(1:14). 그리고 그 의 성육신은 크리스챤 리더쉽의 기본적 인 원리 – 섬기는 지도력-을 제공하였 다.(막 10 : 43-44)

엥스트롬(Engstrom)은 “예수는 모든 지도자들에게 위대함은 지위나 서 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Service) 에 있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그는 참 리더쉽은 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고 하였다. (주1)

래리 리챠즈(Larry Richards)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지도자는
(1) 군림하 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있어서 일체감을 주는 지도자
(2) 그의 생애를 주며 희 생하는 지도자
(3) 그가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보여주어 삶의 모본을 통해 따 라오게 하는자 라고 하였다. (주2)

김계용목사님 – 그분이야말로 우리 이민자들과 같은 분이셨다. 그분의 생 애는 순전히 성도들을 위한 헌신의 삶 이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설교이었다. 더구나 그의 생애는 외로운 순례자의 생애이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이상현교수는 그리스도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 없는 주변인간 (Marginal Man) 이라고 정의하고, 바로 우리 Asian-American 이민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였 다. 그리고 우리 이민자들이 자신을 그 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될때 순례자로서 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고 하 였다. (주3)

김계용목사님은 오늘 미국사회의 주 변에서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 리 모든 이민자들이 쉽게 동일시 하게 되는 그런 분이었다.

순례자는 외로운 여행길을 가는 사람 이다. 순례자는 늘 본향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는 적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다. 순례자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민자의 삶은 바로 순례자의 삶이며, 김계용 목사 님의 생애야말로 그러한 생애이였다.

1.2. 그분은 우리에게 아버지 같고 어 머니 같은 분이 였기에

역사적으로 볼때 한국의 종교는 고대 에는 샤마니즘, 중간기에는 불교, 그리 고 근대에는 유교가 지배적이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는 한국인의 심성에 가 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는 역시 유교와 샤마니즘이다.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유교는 한국남성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샤마니즘은 한국의 여성들을 통 해서 한국인의 심성을 형성하여 왔다.

유동식교수는 한국의 성령운동을 부성적운동과 모성적인 운동으로 분류하였다.(주4) 그에 의하면 부성적운동은 유교적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율법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한국장로교의 급성장의 배경이 된 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성적인 운동은 샤마니즘의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서 순복음교회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오순절 운동의 배경이 된다고 보았다.

필자가 믿기로는 한국교회의 지도자 는 모든 한국인의 심성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두가지 요소를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 같은 영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자를 원한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어머니처럼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사랑의 지도자를 따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계용목사님은 우리 모두의 지도자이었다. 그는 모든 성도 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그 자신 이 연로하신 분들을 공경하며 아끼셨고 자신도 그러한 존경을 받으셨다. 동시 에 그분은 어머니와 같은 넓은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분이다. 이민 생활에 상처받아 아픈 가슴을 안고 나와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그분을 보기만 해도, 그분의 생애를 생각만 해도, 그리 고 그의 위로의 메세지를 들음으로 치유 함을 받게 되는 그런 위로의 종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그분 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존경이 있었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 목사님이야, 나의 목사님이야 하는 공 통적인 고백이 있었다.

“내가 이북에서 나올때 우리 아이들이 꼭 저만 했었지…” 가 족과 떠나있는 40여년간, 그분 의 마음은 항상 고향집, 남기고 온 가족들을 향하며, 그들의 과 거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 을 그려보셨던 것이다. 김목사 님의 생애는 고난과 고독의 생 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역 경을 신앙으로 이기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였다.

 

2. 어떤 우리 목사님이셨는가?

2.1. 영원한 순례자이셨던.

전술한 바대로 김목사님의 전생애는 순례자로서의 생애이었다. 그가 사랑하 는 부인과 자식들과 헤어진지 40여년 만에 결국 이북 고향집을 찾아가 사랑하 는 아내의 품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치 기까지 그분의 전생애는 외로운 순례의 여행길이었다.

필자가 나성영락교회에 부임한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번은 김목사 님께서 필자의 자식들이 즐겁게 뛰노는 것을 보시면서 혼잣말처럼 말씀하였다. “내가 이북에서 나올때 우리 아이들이 꼭 저만 했었지…” 가족과 떠나있는 40 여년간, 그분의 마음은 항상 고향집, 남기고 온 가족들을 향하며, 그들의 과거 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려보 셨던 것이다. 김목사님의 생애는 고난 과 고독의 생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의 역경을 신앙으로 이기며 교회를 섬 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섬겼던 대구중앙교회, 서울무학교회, 브라질 연합교회 그리고 나성영락교회는 모두 놀라운 대부흥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순례자는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사명을 위해 새로운 개척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떠나온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 가는 사람이다.

김계용목사님. 그는 북에서 피난온 1,000만 피난민의 한사람이요, 수많은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며 외로운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이민자의 한 사람이었다. 외로우나 고결했던 그의 생애는 온유 겸손하며 소박했던 그의 성품과 함께 성도 들에게 삶의 한 본보기가 되었고 존경의 조건이었다.

2.2. 섬기는 종이셨던

이민교회 성도들은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안정하지 못하고 주류사회로 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언어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좌절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러한 이민자들에 대한 목회는 [사랑과 치유의 목회] 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김계용목사님의 목회는 이런 점에서 이민상황(context)에 적절한 목회 이었다. 그는 측근의 사람들에게 “이민목회 는 사랑이야, 저마다 사랑해 달라는 거 야. 고국 떠나 누구나 사랑이 그립거 든” 하시며 이민목회를 한마디로 [사랑의 목회] 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의 20 여년 이민목회의 결론이었다.

그의 목회는 돌보는 목회(Caring Ministry)이었다. 그에게는 노인이나 어린이, 초신자나 교회 중직자들이 모 두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는 환자심방 에 힘쓰며(사실 큰 교회의 목회자는 시간이 부족하다), 심방시에는 그 가정의 모든 가족들이 [목사님의 사랑]을 느끼 게 만들었다.

그의 목회는 섬기는 목회(Serving Ministry)이었다. 그는 늙은이에게나 젊은이에게 언제나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보여 주었으며, 남을 대접하기를 좋아하신 분이었다. 그는 회의를 민주 적으로 운영하며, 남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는 소신이 강한 지도자였으나, 양보와 겸손과 인내로서 목적한 바를 매우 부드럽게 관철해 내는 지도자였 다.

그의 목회는 사랑의 목회(Loving Ministry)이었다. 그는 신학교시절에 시작한 “산돌회” 사업에서 부터 마지막 사역이 된 “사랑의 쌀 보내기운동”에 이르기까지 남을 돕는 일에 힘썼다. 어려운 이를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남몰 래 장학금을 주었다(필자도 그런 목사 님의 격려금을 받은 적이 있다). 누구 보다 개인적인 아픔을 갖고 있는 그분 이었지만 그럴수록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선 사랑의 목회자이었다.

그는 마치 다리와 같은 목회자 (Pastor as a Bridge)였다. 교인과 교인 사이에 다양한 의 견이 있을 때에도 김목사님의 리더쉽은 이를 잘 조정하여 화 합을 이루어 나갔다. 그는 1세 와 2세의 다리 역활을 하였다. 김목사님의 리더쉽은 이를 잘 조정하여 화합을 이루어 나갔 다. 그는 1세와 2세의 다리 역 |활에도 앞장섰다. 일찌기 2세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2세 목회 와 영어목회에 선구자적인 역활 을 하였다. 김목사님의 지도력 은 개교회에만이 아니라 미국교 계와 나아가 한인사회의 불신자 들에게 까지도 미쳐졌다. 그의 사생활을 아는 교포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므로 그는 실로 교포사회의 지도자이었다. 그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도 가교가 되었던 것이다.

2.3. 화해의 사도이셨던

이민교회는 갈등이 일어나기 쉬운 교 회이다. 그 이유는

(1) 이민자들의 대부 분은 한국에서 가졌던 직업이나 특권을 포기하고, 과거의 경력이나 전공과 상 관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불만이 교회에서 권한(power)을 행사하려는 부정적 경향으로 나타나기 쉽다.
(2) 이민자들의 삶의 정 황이 긴장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불화하기 쉽다.
(3) 한국 이 민자들은 대개 부모와 형제의 초청에 의해 미국에 왔으며, 그래서 이민교회 는 [가족교회] 의 성격을 띄고 있다. 자연히 가족과 비가족간에 갈등이 일어날 여지가 많다.
(4) 이민교인들은 각자 다른 교회배경(back ground)를 갖고 있 으며, 이는 교회행정 및 신앙기질에 서 로 다른 견해를 나타나게 하기 쉽다.

따라서 이민목회자는 때때로 일어나기 쉬운 교회내 갈등을 방지하고, 또 일어난 갈등을 잘 소화시키는 일에 전 문가가 되어야 한다. 김계용 목사님은 이러한 화해자로서의 역활을 잘 수행한 이민목회자였다.

그는 마치 다리와 같은 목회자(Pastor as a Bridge)였다. 교인과 교인 사 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에도 김목사님의 리더쉽은 이를 잘 조정하여 화 합을 이루어 나갔다. 그는 1세와 2세 의 다리 역활에도 앞장섰다. 일찌기 2 세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2세 목회와 영어목회에 선구자적인 역활을 하였다. 김목사님의 지도력은 개교회에만이 아 니라 미국교계와 나아가 한인사회의 불 신자들에게 까지도 미쳐졌다. 그의 사 생활을 아는 교포들은 모두 그를 존경 하였으므로 그는 실로 교포사회의 지도 자이었다. 그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도 가교가 되었던 것이다.

2.4. 위로의 설교자이셨던

김계용목사님을 생각할 때 그의 은혜 로운 설교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설교는 쉽고 평이했으나 이민자들 의 심금을 울려주는 감동적인 설교였 다. 필자는 김목사님의 설교가 그토록 이민자들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그 가 청중 중심의 설교가 (Receptor Oriented communicator)였기 때문이라 고 생각한다. 그는 이민자들의 정황을 이해하였고, 그들의 필요(need)를 알 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종종 설교를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져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설교할 때 교인들이 미숙한 포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잡기 좋게, 알기쉽게 설교를 전달하기 위 해 힘쓴다고 했다.

김목사님은 삶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었다. 그러나 그는 늘 유모어를 가지고 오히려 밝고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에 힘썼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설교 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의 설교는 위로 적이었으며 적어도 한두번은 꼭 청중을 웃기는 밝은 설교이었다. 자신의 고통 을 신앙으로 이기며 밝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김목사님의 모습은 교인들에 게 하나의 본보기 (Role-Model) 가 되었 고, 그의 설교는 큰 감명을 일으키곤 하였다. 광야 같은 이민생활의 의미를 말씀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될때 성도들은 언제나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2.5. 앞을 내다 보시던

김목사님의 또하나의 특징은 그가 미래지향적(Future-Oriented)인 지도 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지혜와 미래를 내다보 는 비젼을 가진 지도자이었다. | 그가 미래를 향한 경륜을 가진 지도 자가 된것은 먼저 그 자신이 미래지향 적인 삶을 추구한 만년 젊은이였기 때 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의 사역을 개척해 나갔으며 계속해서 배우는 목사이 었다. 그는 특히 2세교육에 있어서 미래지향적이었다. 항상 충분한 교육부 예산으로 2세 교육을 지원하게 하였고, 유능한 2세 목회자를 등용하기에 힘썼 다. 그는 초기 이민교회가 한글교육만 을 집착할때 영어권의 아이들을 위해 영어예배를 시작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최근 이주해온 아이들이 늘어나자 고등 부 한글부를 시작하여 이중구조(한국 어와 영어) 교회학교의 길을 열었다. 또한 성인이 되는 영어세대를 위해서는 어느 교회보다도 먼저 성인 영어예배를 시작하였다.

순례자는 외로운 여행길을 가 는 사람이다. 순례자는 늘 본향 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는 적 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 다. 순례자는 언제나 하나님만 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 민자의 삶은 바로 순례자의 삶 이며, 김계용목사님의 생애야말 로 그러한 생애이였다.

김목사님의 사역을 말할때 그의 선교 의식을 뺄수 없다.

김목사님은 일찌기 한국교회가 아직 선교에 눈을 뜨지 못했을때 브라질선교사로 파송되었고(1967-1972) 안식년 귀국후 1년간을 총회 전도부 총무로 일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그후에 도 교회와 교단사업을 통해 꾸준히 선 교사업의 확장에 힘쓰게 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김계용목사님 – 그는 앞을 내다보는 지도자이었다. 그는 은퇴시에는 자신과 가장 비숫한 기질의 후계자를 지명하여 이민교회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세대 교체를 이루시고, 자신은 자유롭게 세계 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특히 남미선 교에 힘쓰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은 그를 속히 하늘나라로 불러들여 땅위의 수고를 그치고, 주님의 위로와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다.

김계용목사님- 그는 실로 우리 모두 의 이민 목회자요, 이민 목회자의 이상 이었다. 이미 그분은 가셨지만, 그분을 본받는 이땅의 성도들과 후배 이민 목회자들에 의해 주님의 나라의 사역은 계속 성취되어 질줄 믿는다.

(주)
1. Engstrom, Ted W. The Making of a Christian Leader. Zondervan Pub. House. 1976. P.37
2. Richard, L. A Theology of christian Education, Zondervan Pub. House, 1975. P.P.133-134
3. 이상현, “순례자의 신앙” 이민목회 미장로교 한인목회자문위원회 1987. P.111
4. 유동식, “한국교회와 성령운동” 한국교회 성령 운동의 현상과 구조 크리스챤 아카데미 1982 P. P. 10-18

* 이 글은 한마음 42호 (11/1/1992) 의 42페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