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작은 도시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부부는 늘 행복함으로 지냈는데 어느 날 아직 젊은 나이의 남편이 실직을 당했습니다. 쌀독의 쌀은 몇 알만 남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배는 산월이 가까워 불러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마다 인력시장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남편에게 차려줄 저녁거리조차 없는 것이 서러워 아내는 그만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렸습니다. 아내가 우는 이유를 아는 남편은 아내에게 다가가 그 서러운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당신 갈비 먹고 싶다고 했지? 우리 외식하러 갈까?”
외식할 돈이 없다는 것을 훤히 아는 아내였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밝은 목소리가 좋아서 아내는 그냥 피식 웃고 따라나섰습니다. 남편이 갈비를 먹자며 아내를 데려간 곳은 백화점 식품매장이었습니다. 식품매장 시식코너에서 인심 후하기로 소문난 아주머니가 젊은 부부를 발견했습니다. 빈 카트, 만삭의 배, 파리한 새댁의 입술, 그냥 두리번거리는 남편의 눈길, 시식 코너 아주머니는 한눈에 부부의 처지를 눈치챘습니다. “새댁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봐요. 임신하면 입맛이 까다로워진다니까.” 다른 시식코너의 직원들도 임신한 아내의 입맛을 돋워줄 뭔가를 찾으러 나온 부부처럼 보였던지 자꾸만 맛볼 것을 권했습니다. 부부는 그렇게 넓은 매장을 돌며 이것저것 시식용 음식들을 맛봤습니다. “오늘 외식 어땠어?” “응 좋았어, 여보.”
그리고 손을 잡고 돌아가는 부부의 장바구니엔 달랑 다섯 개 들이 라면 한 묶음이 들어 있었고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보는 젊은 부부의 눈에는 행복한 눈물이 젖어들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행복이란 가진 것으로 잣대를 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진 것은 행복을 플러스시키는 도구일지 몰라도 때로는 그것이 불행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 가진 것이 재물이든 지식이든 권력과 명예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감사할 줄 모르고 언제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런가 하면 삶의 여러 자리에서도 낡고 쓸모없는 것 같은 자신의 악기, 곧 아무것도 내세울 만한 것 하나 없는 환경 가운데서 감사함으로 너무나도 감미롭고 황홀한 삶을 연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 잘 잤다”라고 미소를 머금고 기지개를 켜는 사람과 “아!, 죽겠네”라고 하면서 몸을 한 번 더 돌려 눕는 사람의 하루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웃는 얼굴로 시작하는 사람과 불편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의 하루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열린 마음에 사랑이란 싹이 돋는 법입니다. 거기서 삶은 메마르고 거치른 광야에서 차츰차츰 푸른 초장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마음도 풍요롭게 되고 감사함으로 삶이 넉넉해지는 법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감사로 행복을 누리는 추수감사절을 보내시는 나성영락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윤성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