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을 넘어서

사선(사선)을 넘어서
6.25!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이벤트라면 역시 6.25 사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쟁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역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 사건도 없다. 하나님은 소망을 잃고 패망직전에 있던 대한민국땅에, 애치슨라인이라는 금까지 그어놓고, 상관하지 않겠다는 미국과 UN군을 불러들여 우리나라를 지키도록 조치하셨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김일성의 손에 떨어졌다면 오늘날 이땅에 ‘코리아타운’ 이라든가 ‘나성 영락교회’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조국의 절반을 구하시고 또 그중에서 소수의 무리를 골라 이땅으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으로 보내신 이유는 각자각자 다양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적어도 우리 혼자만 잘먹고 잘살라고 보내신것은 아니다. 우리각자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또 세계선교의 사명도 주셨다. 이제 또다시 6.25 42주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운명과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 한 참전용사가 있다. 그는 무슨 거창한 군사전문가도 아니다. 장군이나 장교도 아니다. 그제 ‘내 목숨 바쳐서 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하는 애국심하나 갖고 29세의 늦은 나이에 자원입대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속에 수많은 전투와 전투, 쏟아지는 폭탄속을 헤치고 나온 평범한 병사였다. 이 병사의 생애를 통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인생 속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하시며 그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청년시절과 공산당의 핍박
6.25 참전용사이며 서울영락교회에서 시무장로로 봉사하다 15년전 도미한 장창인 장로는 1922년 2월 17일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에서 장준호선생과 안소조 어머니 사이에서 2남2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한국 초대교회 시대에 증조할머니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계속 이어져온 신앙의 고리는 장창인장로의 손주들에게까 지 6대를 이어져 오고 있다.
평생을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양복기술 자의 외길을 걸어왔던 그는 일제시대 말 기에는 잠시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징용을 피해 고향으로 피신해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이북 땅에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잡으면서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던 청년 장창인이 공산당들과의 마찰을 일 으키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소위 부르죠아 출신은 아니었으나 사상이 불온한 종교인이라는 이유에서 그는 항상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그가 공산당이 원하는 시위에 참석하지 않는것도 하나의 화근이었다. 멋 모르고 한번 시위에 가담해보니 김구타도, 이승만타도를 외치며 팔을 휘두르는 데 팔이 올라가질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지병을 핑계삼아 두 문불출하다가 새벽 4시반이면 어김없이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사실 그 당시 그는 학질을 오래 앓고 있던 참이 었다. 때때로 공산당원들이 집에 찾아와 어디가 그리 아프냐며 머리를 짚어보면 열이 심했으므로 “아프긴 아픈 모양이군’ 하면서 물러가고는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때의 병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 하시고자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공산당이 그를 미워한 또 하나의 이유 는 당시 그가 봉사하던 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시위에 동원하려는 것을 저 지한 데 있다.
어느 주일날 아침 민청위원장과 세포 위원장과 보안서원 3명이 따발총을 들고 교회당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를 본 장 창인장로가 그들을 저지하면서 “선생님, 여기는 못들어 갑니다. 총을 메고 어디를 들어가려는 겁니까? ‘신성불가침’ 이라는 중앙당의 지시도 모릅니까?’하고 따졌다. 그 당시에는 공산당들도 신성불가침이라 든가 종교의 자유 같은 것이 비록 형식 적이지만 외형적으로 공포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성불가침을 내세우며 조리있게 따지자 총을 소지하지 않은 2명만 교회당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앞에서 장창인장로는 어린이들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있는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시위에 참석시키려 데리러 왔다. 그러나 신앙은 자유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시위에 참석해도 좋고 여기 그냥 있어도 좋다” 하니 따라 나설 어린이가 한명도 있을리 없었 다. 그들이 빈손으로 흥분해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절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을 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어느 캄캄한 그믐날 새벽, 새벽제단을 쌓기 위해 교회로 향하는데 언덕 위에 있는 교회를 쳐다보니 하늘로부터 드럼통보다 더 굵어보이는 강하고 밝은 불기둥이 교회 위로 내려오며 교회 천장을 뚫고 교회당 안으로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서니 그 불기둥은 사라지고 다시 어두움이 짙게 깔렸다. 이 신비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때 공산당의 강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생각하고 더욱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월남
이와같이 그가 반동분자로 지목받게 되자 보안서에 끌려가 철야심문을 받고 집에 돌아온 그가 소련에 “강제노동 형을 받아 끌려가기 몇시간 전에, 공산당과 연줄이 있는 친척으로부터 해뜨는 즉시 소련으로 끌려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새벽에 자다말고 일어나서 정처없는 월남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혼자 떠나면 남아있는 동생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우려하여 동생 장창학집사와 함께 월남의 길을 떠났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 길을 떠났는데 기차로 사리원에서 내리니 38선이 가까워 지는 관계로 보안서원들이 승객들을 조 사하며 월남하려는 눈치가 보이는 승객은 즉각즉각 체포하고 있었으나 장창인장로 형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조사 과정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믿는 이유는 당시에는 빈몸으로 떠나도 의심받고 체포되는 시 절이었는데 양복기술자였던 그가 생업을 위해 커다란 발재봉틀까지 등에 짊어지고 길을 떠났으니 이게 어디 일반 여행자로 여겨지겠는가? 당연히 도망자로 보였어야 마땅하겠지만 보안서원들이 그들 형제 앞에 선 사람과 뒤에 선 사람을 체포하면 서도 그들형제는 그냥 넘어간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기 때 문이었다.
사리원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동안 또 다른 월남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해주에 있는 4촌동생에게 가는 중이라기에 동행하여 그의 집에 유숙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그의 집에 당도해보니 그 집에 간 것이 커다란 잘못임을 알게 되 었다. 그집은 식당을 하는 집으로 그집 아들인 사촌동생이라는 자는 공산당중에도 골수분자인 민청위원장이었다. 묘한 것은 그 집에 유숙하러 오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8시면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38선을 넘는 사람들 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사실은 보안서로 넘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창인장로 형제는 복장이 단정해서였는지 돈을 좀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밥이라도 더 팔게 하려는 생각에서 즉시 체포하지 않고 며칠을 더 유숙케 했다.
답답한 심정으로 며칠을 유하고 있으 려니 민청위원장 어머니가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임을 알고 말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38선을 넘고 있느냐 물으니 “38선이 다뭐요? 그들은 다 보안서로 끌려갔다오” 하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 말에 걱정이 된 장창인 장로가 “할머니 저희 좀 구해주세요. 제게 딸린 식구가 9명이나 되는데 제가 잘못되면 그들이 살길이 없습니다.” 하고 사정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물으니 “안돼요!” 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낙심은 되었으나 다시 한번 부탁하여 주 기를 간청하니 그 어머니가 다음날 아침 다시 부탁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는데 “아범아, 내가 너에게 다시는 이런 부탁 하지 않을테니 이번 한번만 제발 들어다. 오. 저 젊은이들은 그냥 보내주도록 하자”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니 그가 “어머니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는 사라졌다.
그래서 극적으로 그 할머니의 주선으로 38선 안내인을 고용하여 38선을 넘게되 었다. 38선을 넘던 밤, 38선 근처에 조 그마한 야산에 산사태가 나서 계곡이 생 긴 지점에 이르니 갑자기 셰퍼드 경비견 이 나타나서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안내인조차 낙심하여 이제는 잡혔다며 그 자리에 주저 않으려는데 그 개들은 쏜살 같이 그들을 통과하여 앞서가던 다른 일행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무사히 공산당 경비병을 피한 다음날 아침 길을 가다가 한 여자를 만났는데 자기는 어제 체포된 일행 15명중에 유일하게 피신한 사람이 라면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38선을 넘나 들며 위험하게 장사를 하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시고자 경비병들의 눈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게 해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온가족이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처음 찍은 가족사진. 장창인 장로 가족의 재결합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뒤에 서있는 청년이 동생 장창학 집사. 최근 도미하여 현재 본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장창인 장로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백정자 집사. 백성탁 집사 부인으로 호산나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 옆의 소 년이 큰아들 장정남 집사로 역시 본교회의 벧엘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이 어린소년이 장성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들이 올해 대학교를 졸업했다.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한장의 사진이다.
서울에서의 정착과 6.25 발발
그리하여 무사히 38선을 넘어 서울에 들어오니 늦은 밤이었다. 여관에 투숙하여 자고나서 여관비를 내고나니 남은돈은 단돈 65 전이었다.
낯설은 타관땅에서 돈은 떨어지고 생 계는 막연했다. 그런데 동생이 갖고온 코트를 팔아 솥과 쌀을 사갖고 왔다. 또 옷을 저당잡혀 빌린 돈을 가지고 점포를 세내어 “형제 양복점”을 개업했다.
두어달이 지나자 동생이 북한에 있는 형수님과 가족들을 데려오자고 말했다. 가족들이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다시 월 북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결국 배짱있는 동생이 다시 월북하여 식 구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 사의 기도를 드렸다. 장창인장로는 “그때 동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에게 큰 일을 해주었다” 면서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장창인장로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처음 으로 신세진 사람은 경찰청 고문관의 통역관으로 있던 최원극이었다. 그런데 6.25 사변이 발발하자 피난을 못간 최원극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우리 원극이는 이제 죽었다” 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그가 피 신하고자 해도 경찰청에서 일한 사실을 두려워하여 친척들이 받아주려 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여 죽어도 같이 죽자며 그를 불러 그의 집 마루밑에 숨겨주었다.
최원극과 함께 양복점 마루밑에 숨어 있던 어느날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옷을 찾으러 왔다며 어머니가 장창인장로를 불렀다. 당시 그의 양복점은 이대와 연세대 근처여서 대학생 손님이 많았으 므로 의심없이 나가봤더니 그 여자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공산당원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함께 보안서로 동행할 것을 요구 했다. 나가보니 남자 6명이 굵은 각목을 들고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보안서 2층에 끌려가니 책임자가 평소 안면이 있던 ‘옥경이 아버지라는 사람 이었다. 그는 장창인장로를 보자마자 욕 설을 퍼부으며 “이승만에게 얼마나 녹을 먹고 살았느냐”며 대들었다. 그래서 “양복만드는 사람이 이승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그와 입씨름을 4-5분 하다보니 현기증을 느껴 잠시 쉬었다 얘기하자며 옆에 각목뭉치와 함께 쌓아놓은 가마니 위에 엎어졌다. 그 가마니들은 그들이 사람을 때려죽인 뒤에 시체를 넣어 운반 하는데 쓰려고 준비해 놓은 것들이었다. 원래 그 보안서 2층은 올라가면 못살아 나온다고 소문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가마니 위에 엎드리자마자 공습경보가 울리면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기의 공습이 시작되 었다. 보안서원들이 우왕자왕하는 틈을 타서 집으로 도망쳐와 숨었다. 그들은 설마 그가 겁없이 집으로 돌아가 숨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집으로는 조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후에 국군이 수도를 탈환하고 입성할 때 탱크숫자를 세어보니 72대였는데 후 퇴할 때도 보니 고스란히 72대가 후퇴하 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걱정 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CIC 대장 고문관의 통역관으로 있던 최원극이 후퇴중에 장창인장로에게 들려 자신이 CIC와 함께 동경으로 후퇴중이라면서 극비중의 극비이니 사모님에게 조차 말 해서도 않된다는 주의사항과 함께 유엔군 철수계획을 알려주었다. 즉 유엔군작전 계획은 부산까지 포기하도록 되어 있다. 면서 자신의 친아버지 조차 구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생명의 은인인 형님 만은 구해야겠으니 즉시 부산으로 내려가 어떻게든지 제주도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가 주선하여 제주도에서 동 경으로 항공편으로 피신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국군 자원 입대
그때 그가 이말을 들으며 느낀 것은 혼자만 빠져 살 것이 아니라 이래 저래 죽을 것 같은데 내나라 지키다가 죽어야 겠다는 생각에 29세의 늦은 나이로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당시 건강을 해쳐 폐가 많이 나빠진 상태여서 신체검사를 받았다면 군에 입대도 할 수가 없는 상 황이었다.
그러나 대기소에서 지원자들에게 갑종 신체검사에 합격할 자신있는 사람은 이 쪽으로 모이라는 교관의 말에 무턱대고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신체검사도 생략 한채 입대는 하였으나 막상 소총으로 훈 련을 받으려니 폐에서 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훈련도 마치기 전에 건강을 해쳐 죽을것만 같았다.
그런데 입대하고 얼마 안되어 어느날 인사계의 일등상사가 불러서 가보니 사 회에서 양복점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사격훈련을 제외한 모든 일반 훈련에서 면제시켜주면서 부대내의 옷수선하는 일을 도맡게 했다. 그리고 식사도 특별대접하여 일반사병들의 꽁보리밥이 아닌 장교식당 밥을 먹도록 선처했다. 그래서 그때 장 교식당의 영양가 높은 음식을 잘 섭취하 여 휴양할 수 있어서 건강이 많이 회복 되었다.
그후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광주로 파견되어 중화기 중대2번 탄약수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아침에 갑자기 통신학교에 가서 훈련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통신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전투에 나갔던 전우가 적군을 향하여 박격 포를 발사한다는 것이 위를 확인하지 않고 쏘았다가 포탄이 큰나무에 부딪쳤다가 되돌아와 폭발하는 바람에 많은 군인이 죽고 부상당한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그가 만약 통신학교로 가지않고 전 투에 투입되었다면 다른전우들과 함께 그 현장에서 죽던지 부상을 입었을 것이 확실했기에 하나님이 지키신 것을 그가 확 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6.25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지의 하나였던 설악산 향로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23개월간 근무했다. 설악산에서 전투가 치열하던 어느날이었다. 야간에 전투가 벌어져 국 군과 인민군 양측에 수도 없이 많은 군 인들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전투가 길어 지면서 인민군측에 총알이 떨어지자 인민군 2명이 국군측에 투항해 왔다. 그래서 인민군들의 보급품이 떨어진줄 알고 안 심하고 있는데 또 대포알이 날아오는 것 이었다. 막 인민군측에 보급품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국군측에서 총알이 떨어지며 후퇴를 해야할 상황으로 뒤바 뀌었다. 후퇴중에 수백년 묶은 집채만한 나무가 포격을 받고 쓰러지며 길을 막았 다. 20대초반의 연소한 전우들은 나무를 뛰어넘어 대피하는데 이제 30을 넘어선 장창인장로는 나무에 걸려 미끄러지며 넘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점프를 시도하니 자신도 모르는 힘이 넘치며 그 큰나무를 뛰어넘 어 탈출에 성공하여 생포를 모면했다.
전우들과 함께 군대내의 교회 앞에서, 전우들 사이에 그는 항상 ‘장영감님’ 으로 통했다. 너무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 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언젠가는 대관령전투에 투입되어 현지 에 도착하자 국군 3군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보급품이 끊어진채 고생하고 있었다. 장창인장로가 소속된 20연대가 포위망을 뚫고 3군단을 구출해 내었다. 그런데 그들이 포위도중 너무 고생하고 탈진하여 강행군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지휘부는 계곡에서 밤을 쉬고 아침에 행 군하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사방에서 총격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중공군 에게 또 다시 포위가 된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3중포위를 당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탈출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대에는 열심으로 주를 믿는 병사 5명이 있었다. 이들이 어느정도 열심이었는가 하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 고 주일날은 민가의 교회당으로 내려가 예배드리다가 매도 많이 맞고 기합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섬기는 신실한 종들이었다. 이들 5명과 함께 무사히 후퇴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릴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짙은 안 개가 국군진영으로 자욱하게 내리는 것 이었다. 마치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바로 1미터 앞이 안보이는 진한 안개였다. 후퇴중 그들은 국군지게부대포로 2명을 구출해 함께 후퇴했는데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중공군들이 깊이 잠들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그중 1명이 대검으로 중공군 1명을 찔러 죽이고 탈출했는데 칼에 찔리고도 그가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비명한마디 못 지르고 다만 벌떡 일어났다가 쓰러져 죽더라는 것이다.
이 믿음의 군인들의 기도가 안개를 몰 고오고 적군들이 잠을 들게한 것이었다. 그래서 철통같이 3중포위된 곳에서 유유 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위급한 때에 부르짖으라! 위급할 때마 다 그는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진정코 그를 눈동자와 같이 지 키시고 보호하셨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전쟁중 이었지만 8월 추석이 돌아왔는데 주둔지 역 인근마을 주민들은 피난가고 빈마을에 들어가서 추석떡을 만들 생각에 곡식들을 밭에서 수거하는데 한 부대원이 그만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모두 땅에 엎드렸으나 너무 늦어 많은 군인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지뢰를 밟은 군인은 발이 없어져 발쪽으로 피가 콸콸 쏟아지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무사했던 장창인 장로가 그의 다리를 묶어서 지혈을 시키 고 다른 군인들에게도 응급조치를 취해 줬다. 그날 저녁 부대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는데 옆에 있던 전우가 옷이 왜 그 러냐기에 바지를 보니 군복의 다리쪽이 날카롭게 오려져 있는것이 아닌가? 지뢰 파편이 옷을 찢고 지나간 것이었다. 실로 눈금하나 사이 차이로 다리에 중상을 입을 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피 한방울 흘리지 않도록 보호의 손길을 뻗치신 것이었다.
아직 처녀 총각이었던 장의청 권사와 정창인 장로의 약혼사진, 파란 만장한 반세기를 지나 고 작년에 결혼 50주 년을 기념한 금혼식을 치렀다.
“내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그는 전쟁의 수 많은 위기속에서 살려주신 은혜에 보답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빈손으로 제대한 그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열심히 봉사하는 길 밖에 없었다. “내 모습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구원하신 주 날 받으옵소서” 찬송과 같이 교회 봉 사에 열성을 다하며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에 열심이다보니 한경직목사와 개인적 인 친분관계를 맺게되고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장창인장로는 말한다. 그는 서울영락교회에서 1962년에 안수집사, 1970년에는 장로장립을 받고 전도부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였으며 전도부 사업관 계로 전국의 개척교회와 군부대내의 교 회를 많이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서울영락교회에의 마지막 봉사는 15년전 도미후 1년만에 설악동교회 건축 총책임자로 봉사한 것이었다. 설악산에는 사찰이나 암자는 많지만 이 산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예배드릴 교회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경직목사가 친히 그를 미국에서 초청 하여 1년간 귀국하여 현재의 설악동 교 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본 교회에서는 장년 성경공부반 사회를 맡아 봉사한바 있으며 현재는 산타모니카 바닷가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며 여생을 주님께 봉사하며 지내고 있다. 또한 사모 장의청권사도 젊어서 주님께서 받은 신 유의 은사를 가지고 이제 70세의 고령에 도 불구하고 지금도 불치의 환자들을 찾 아다니며 안수기도로써 환자들을 치료하 고 있다. | 참으로 수많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 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오늘까지 지내온 장창인장로, 이제는 슬하에 자녀 3남2녀 를 두고 있으며 친손주 8명과 외손자 3 명을 둔 다복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뒤안길을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 게 의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키시고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된다.
장창인 장로의 장로장립기념사진(1970년)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 장로님이 장창인 장로 (본교회에서 눈에 익은 장로님들도 여러분 눈에 띤다. 두번째줄 오 른쪽에서 두번째 장로님이 본교회 창립멤버이며 첫 원로장로인 고 백경보 장로, 맨 앞줄 왼쪽 끝에는 본교회 에독선교회장을 역임한 강학주 장로, 중앙 한경직 목사 왼쪽 옆에는 창립 멤버로 본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아끼지 않으셨던 홍순건 장로, 장창인 장로 오른쪽 옆이 원로 음악인이며 현재 카나다에서 목회중인 박재훈 목사(당시 장로) 그 옆이 80년대 본교회의 행정목사로 수고하신 김윤근 목사.)
장창인 장로의 신앙 회고록
취재: 강원경
한마음 45호 (1993년 7월) 74페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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